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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독립유공자(1) 이상재 선생

2016년 04월 08일(금) 13:15 [(주)온양신문사]

 

ⓒ 온양신문

이상재 선생은 1850년 10월 26일에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났다.

1881년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박정양의 추천으로 그의 수행원이 돼 일본의 국정을 시찰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개화사상을 갖게 됐다.

이 여행 도중에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됐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도 선진제국에 뒤지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을 꾀할 것을 역설했다.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해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돼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1887년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도미(渡美)했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하지 않고 주미청국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자기가 대리해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주미조선공사의 독립적 활동을 저지하려 하자 크게 분개해 청국공사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 해 자주독립외교를 실천했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돼 사범학교·관립중학교·관립소학교·외국어학교 등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부심했다.

1896년 7월 2일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 동 협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등을 건설했으며, 국민을 계몽하고자 ‘토론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898년 2월에는 친로수구파 정부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租借)를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더 이상의 이권양여를 저지했다.

계속해 의회를 설립해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윤치호를 부통령·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하는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친로수구파의 모략에 걸려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됐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돼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해 10여 일 만에 석방됐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 개혁 방안을 논의하다 개혁당으로 몰리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감옥 안에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했고,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기독교도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한 1907년 4월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자국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1910년 8월 29일에 우리가 일제에 병합되자, 주로 기독교청년운동에 종사하며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고자 했다.

1911년 4월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해 남궁억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와 함께 종교단체 친목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고자 힘썼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4개월 만에야 석방됐고, 1920년 8월에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의원단들을 만나 한국의 탄압받는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1921년에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그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되는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일제에 탄압받는 한국기독교운동을 폭로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와 일본 기독교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 기독교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에 추대돼 당시 새로 대두되는 자치론을 저지하고 완전독립을 민족운동노선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7년 2월에 완전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를 창립하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지만, 그 다음 달에 노환으로 서거해 10만 군중의 애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일생을 통한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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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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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장 등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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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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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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