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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지역의 3.1운동 인명록(5)

박장래·이달용·이민호·이준열·성배호

2019년 02월 01일(금) 13:32 [온양신문]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는 지난해 4월 아산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조사용역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총론과 연구네역 요약, 주제별 연구내용 등이 수록돼 있는 데 본지는 지난해부터 총론과 요약에 이어 주제별 연구내용 중의 하나인 각 지역별 현쟝조사를 연재한 바 있다.

이번부터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아산지역의 3.1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아산지역 3.1운동사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조명하는 ‘아산 3.1운동 관련 인명록’을 연재한다. <편집자註>

▲박장래(朴璋來, 1899.1.3.~1940.4.6)
송악면 거산리 41번지 출신으로 1919년 2월 말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예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해 독립가 등을 배우며 3월 8일까지 머물렀다.

고향인 송악면은 인구가 적어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공주로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모임을 3월 10일에 가졌다. 그가 공주 영명학교 졸업생인 까닭이다.

영명학교 조교인 김수철의 방에서 영명학교 학생 안기수와 신의득에게 서울 및 기타 각지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경성에서는 여학생까지 나서서 독립시위를 하고 있는 판에 공주에서는 남자다운 의기와 용기가 없는 자들이 많다”고 말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독려했다. 이어 박장래는 종이에 쓴 자신이 만든 독립가를 건네주었다.

박장래의 활동은 사전에 일경에 발각돼 피체됐다.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해 5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됐으나 다시 상고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1년 6월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달용(李達鎔, 1889.2.3.~1919.3.18)
본적지는 염치면 강청리 321번지이고, 독립운동 당시 경기 양주군 화도면에 거주했다.

1919년 3월 18일 밤 화도면 마석모루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마석모루에 있는 헌병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돼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헌병의 발포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민호[李敏浩, 1895~1944]
인주 공세리 출신이며 본적은 탕정면 매곡3리로 돼 있다. 이규풍과 오세라의 장남이다. 이세주(李世澍)라는 이명을 썼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3년형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연해주로 망명해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용의조선인명부’에는 그가 1927년경부터 중동선 아청현 지방에서 병원을 경영했으나 불황에 빠졌고, 1930년에는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인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영안대가로 옮겨 병원을 개설하고 오직 의업에 전념하고 독립단체와의 연락을 끊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전향을 가장하고 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해 예상 밖의 일을 감행할 우려가 있어 주의중이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 이규풍이 1932년 사망하자 베이징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했다. ‘소화사상통제사자료’는 그에 대해 ‘민족주의 소유자로서 소련사정에 정통하며 만주에 있을 당시에는 중국공산당 혁명군에 참가해 반만(反滿)항일운동을 감행했다’고 썼다.

정확히 어떤 시점,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민호는 장처명 등과 함께 체포됐다.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돼 병원에 입원했으나,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준열(李俊烈, 1896~1982)
호는 송강(松崗). 7세 무렵부터 큰 매형 윤태선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동몽선습’과 ‘통감’을 통독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친과 형은 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로 하고 윤치오의 내종인 학무국장 이주상의 집에 학교를 부설하자, 11세 되던 해 가을에 온양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다음 해인 1908년 3월까지 공부하고 온양보통학교 보습과 졸업생 20여명과 함께 상급학교로 진학하고자 집단 상경했다.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진학해 1914년 경성고보 제10회 졸업생이 됐다.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의 동맹휴학 위원장으로 피선됐다. 서울에서 각 학교 학생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가 하면, 충남 각지로 돌아다니며 3·1운동을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3·1운동의 열기는 점차 사그라졌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갈 뜻을 굳혔다. 그러나 직접 중국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그는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한 ‘삼남지방 재정 연락관’이라는 사령장을 받았다.

1923년에는 식민지 무산청년 교육을 위한 고학당(苦學堂) 설립을 추진했다. 이후 ‘금광왕’이 되는 이종만이 참여하고, 야시장 을 열어 수익사업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재정난은 더욱 극심해갔고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31년 문을 닫았다.

한편 이 시기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워지고 정치운동에 있어서도 적극성을 드러냈다. 1926년 9월 서울파 공산주의 세력의 조직인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했다. 1927년 2월에는 고학당 학우회를 이끌고 있던 정관진·김태래·이학종 등과 함께 비밀회동을 열어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했다.

1928년 5월에는 조선공산당(춘경원당)(이하 조공) 중앙위원으로 보선됐다. 또한 1929년 1월 조공 중앙위원회를 재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됐다.

3월 서울에서 이민용·정헌태·방한민과 함께 조공을 해체하고 조공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됐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에 소속돼 활동했으며, 1929년 5월 서울 동대문 중심의 신간회 경동지회 발기인이 됐다.

그러나 6월경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193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이후 이종만과 손을 잡고 민족경제자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사회사업 기관으로서 대동사업체의 설립에 참여했다. 대동사업체는 대동광업(주),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등으로 구성됐고, 총독부에 의해 폐교된 숭실전문학교를 잇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대동광업(주)의 전무, 대동출판사의 대표를 역임했다.

해방 이후 공업입국(工業立國)의 뜻을 품고 조선공업기술연맹 초대 이사장, 조선전재기술자협회 고문, 조선광업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46년에는 건국공업박람회 회장, 1947년에는 조선문화협회 위원장, 1948년에는 남조선전력대책위원회 대표위원, 1949년에는 조선발명장려회 위원장을 맡았다.

▲성배호(成培鎬, 이명 成昌汝 1889.12.25 ~ 1944.4.3)
본적은 충남 아산 죽산리 13, 주소는 충남 홍성군 광천면 옹암리(瓮岩里)이다. 1919년 3월 충남 홍성군 광천면에서 독립선언서의 요지를 담은 문건을 인쇄해 배포했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홍성군 광천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명종(李鳴鍾)ㆍ박원식(朴源植)의 주도로 시작됐다. 성배호는 이들의 권유를 받고 만세운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최응모(崔應模)ㆍ오인섭(吳仁燮) 등과 함께 만세시위 준비에 나섰다. 이들은 우선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기로 했다.

3월 16일 서승태(徐承台)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 주며, 일반인에게 알릴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뒤 3월 18일, 서승태는 자택에서 독립선언서 문구를 다듬은 새로운 문서를 작성했다. 이명종ㆍ박원식ㆍ최응모 등과 함께 오인섭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510매를 인쇄해, 그날 밤 광천리와 옹암리(瓮岩里) 일대에 배포하다 체포됐다.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해, 같은 해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됐지만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7일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임재룡 기자  skyblue62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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